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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의 계절 앞에서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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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2-08-29 12: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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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의 계절 앞에서 - 도종환


백일홍꽃 위에는 가을햇살도 노랗게 내리는가. 

아늑한 가을 오후의 햇살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사과빛을 연두색에서 서서히 분홍으로 바꾸어가는 햇살. 

인적 드문 들길에서 코스모스의 살갗을 매만지기도 하다 


대추알 위에 앉아 한잠을 자고 일어났는지 대추알 얼굴 한쪽만 

붉게 만들어놓고 들녘으로 부랴부랴 달려나간 가을햇살. 


가을 오후는 저녁햇살과 함께 소리없이 농익어간다. 

가을햇살이 소리없이 다녀간 발자취를 

우리는 결실이라 부르는가보다. 


"좋은 나무는 못된 열매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내는 법 없고",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포도를 거둘 수 있느냐?" 


이렇게 묻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한 해 나는 어떤 결실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며칠 전 옳은 일을 하려다 감옥에 갇힌 이를 면회하러 

교도소엘 들렀다가 제자들을 만났다. 

그들도 감옥에 가 있는 제 동료들을 면회하러 와 있었다. 


그저 만나면 반갑게 다가와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들이 

아직도 천진하게만 느껴지는데,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돈을 빼앗고 일정한 직업 없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젊은 날을 보내고 있다. 


좋은 나무는 못된 열매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가시나무였을가, 엉겅퀴였을까. 


지붕을 성글게 엮어놓으면 비가 새어드는 법이라고 했는데 

나는 성근 지붕인 채로 아무렇게나 아이들을 머물게 하고 

비가 새는 집을 떠나와버린 것은 아닐까. 


똑같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도 열리고 썩은 과일도 열린다. 

잘 영근 열매도 그 나무에서 열린 것이고 상한 열매도 

그 나무가 낸 것이다.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가르쳤는데 

술집으로 가는 제자가 있고 수녀원으로 가는 제자가 있다. 


생각해보니 무릇 선생 노릇을 하면서 잘된 제자들만 

내 제자라고 자랑하고 비뚤게 나간 제자들은 내 제자가 아니라고 

나 편한 대로만 생각해온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제대로 씨 뿌리고 밭 갈고 잡초를 뽑아주며 

곡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 밭 가는 법,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법을 일방적으로 일러주곤 

밭둑에 앉아 농부인 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씨 뿌린 것을 제대로 가꾸지 않고 곳간만 크게 지어놓은 채 

수확을 기다려온 허황한 농부는 아니었을까. 


제자들에게, 자식들에게,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쓴 모든 글 앞에 나는 허황한 농부가 아니었을가. 


햇살이 필요할 땐 있는 것을 다 내어주는 여름햇살, 

가을햇살이었다가 비가 필요할 댄 구름 뒤에 몸을 숨겨주는 

넉넉한 하늘이지 못하고 조급하고 욕심에 가득 찬 채 

어리석게 결실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이 가을에 나는. 



-도종환 님의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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